과거 한국 사회에서 잡지의 역할은 매우 지대했다. 1960~80년대 권위주의 정권 시절에 잡지는 신문과 방송이 다루지 못하는 사회의 어두운 면을 비판하면서 민주주의의 가치를 전파하기도 했다. 가장 대표적인 잡지가 바로 <사상계>, <창작과비평> 등이었다. 이후 여성 잡지인 <주부생활>, <여원> 등은 한국 사회의 라이프스타일을 한 단계 격상시키는 데에도 크게 기여했다. 이외에 <선데이서울>과 같은 대중 상업 잡지가 국민들 사이에서 화제가 됐고, 청소년 잡지인 <하이틴>, <소년중앙> 역시 청소년 문화 형성에 크게 기여했다.
하지만 지금 한국 잡지의 현실은 매우 힘들어졌다. 한국언론진흥재단의 ‘2024 잡지산업 실태조사’에 따르면 국내 잡지 시장은 매출액이 전해 대비 21.1% 감소하고 발행 부수가 40% 급감하는 등 전반적인 산업 위축을 겪고 있다. 대다수 잡지사가 연 매출 3억 원 미만의 영세한 규모를 유지하는 가운데, 종이값 상승에 따른 제작비 부담과 광고 수입 감소가 경영난을 가중시키는 주요 원인으로 분석되고 있다.
이러한 잡지계의 새로운 부흥을 이끌어 가고 있는 단체가 바로 (사)한국잡지협회(Korea Magazine Association)이다. 지난 2025년 2월 말 제46대 회장에 백동민 아트인포스트 대표이사가 선출된 후, 잡지협회는 혼신의 힘을 다해 변화와 혁신을 만들어 나가고 있다. 취임 1주년을 맞아 백 회장으로부터 그간의 성과와 새로운 미래 구상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신뢰 회복을 향한 첫걸음
백동민 회장은 2006년 월간 <퍼블릭아트>를 창간한 이후 제41대·제44대 잡지협회 수석부회장과 제39대 이사를 역임했다. 이후 인수위원회 위원장(2021~2022), 잡지진흥법 추진위원회 위원장(2021~2022), ‘잡지주간 2022 집행위원장’ 등을 맡아 오랜 기간 활동해 왔다. 또한 2017년부터 2019년까지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직속 제1기 정기간행물자문위원회 위원과 한국 잡지 종합전시관 운영위원회 위원을 역임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해왔다.
이러한 활동을 해왔던 그가 회장 선거에 도전한 것은 지난해가 처음은 아니었다. 그 이전 선거였던 제45대 선거에 입후보했지만, 단 5표 차이로 떨어지고 말았다. 이후 오랜 시간 동안 반성과 성찰의 시간을 가졌던 그는 지난해 다시 입후보, 과반수가 넘는 압도적인 지지를 받아 당선이 되었다. 그는 후보 시절에 잡지협회의 새로운 미래를 밝혀 줄 여러 공약을 발표했었다.
우선 세종학당 등을 포함한 잡지의 국내외 배포 지원 사업을 확대, 우수 전문잡지 인증 사업을 통해 이른바 ‘백년잡지’ 선정, 동호회 지원과 관련해 규제나 차별 없는 최대 300만 원까지 지원, 소득공제 특례 법안 재발의, 문화바우처 사업 등 혁신적인 공약을 내세웠다. 그렇게 1년이 지난 지금, 백 회장은 어떤 소회를 밝힐까?
“지난 1년은 씨앗을 뿌리는 시간과도 같았습니다. 잡지산업의 현실을 누구보다 가까이에서 체감하며, 반드시 개선해야 할 과제들을 명확하게 인식하고 있었기에, 현장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협회의 역할을 재정립하는 데 집중해 왔습니다. 취임 당시 잡지산업이 구조적 위기에 놓여 있고, 협회가 다시 신뢰받는 조직으로 거듭나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말보다 실행’을, ‘형식보다 실질’을 원칙으로 한 걸음씩 문제를 실용적으로 해결해 가고 있습니다. 순탄치만은 않았지만, 회원사 여러분과 함께 하나씩 결실을 맺으며 ‘협회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평가를 듣고 있어 큰 보람을 느낍니다. 아직 갈 길이 멀지만, 지난 1년은 변화의 출발선에 선 소중한 시간이었습니다.”
서서히 나타나는 변화의 조짐
특히 1년간 많은 성과를 거두었다고 볼 수 있다. 지난 1년간 문화누리카드에 잡지가 포함되는 성과를 거뒀고, 잡지 소득공제 특례법 재추진, 잡지금고 금리 인하, 해외 교류 확대, 그리고 회원 복지를 위한 업무협약, 사무처 조직 개편 등 눈에 띄는 진전을 이뤘다. 특히 동호회 활동을 지원하는 지원금을 상향 조정하고, 지난해 ‘잡지의 날’을 맞아 전 회원에게 기념 선물을 보내는 등 직접 체감할 수 있는 혜택도 마련했다. 가장 큰 난관은 여전히 정책 결정 구조 내에서 잡지가 홀대받고 있는 현실이었다. 하지만 정책과 제도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는 잡지의 매력과 가치를 알리고 정부를 상대로 인식을 개선하기 위해 쉼 없이 노력해 왔다고 한다. 특히 단기 성과에 집착하기보다 꾸준한 설득과 연대를 통해 변화를 이끌어 내고자 했다. 그리고 이러한 노력들은 지금 서서히 결실을 맺어 나가고 있다.
“조심스럽게 말씀드리자면, 분위기는 분명히 좋아지고 있습니다. 잡지가 정책 테이블에 다시 오르기 시작했으며, 정부와 국회에서도 잡지와 협회에 대한 인식이 긍정적으로 바뀌고 있습니다. 회원사들도 ‘협회가 실제로 움직이고 있다’는 체감을 하기 시작했죠. 물론 산업 전반의 어려움이 하루아침에 해소되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문제를 외면하지 않고 개선하려는 방향성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의미 있는 변화가 틀림없습니다.”
백 회장은 잡지가 외면받는 가장 큰 이유를 콘텐츠의 질이 아니라 독자와 만나는 ‘접점’의 문제로 보고 있다. 아무리 완성도 높은 콘텐츠를 보유하고 있더라도, 그것이 독자에게 전달되지 못하는 구조라면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현재 잡지가 좋은 내용을 만들고도 선택받지 못하는 상황에 놓여 있다고 진단한다. 이에 따라 앞으로의 잡지는 단순한 종이 매체의 역할을 넘어, 신뢰할 수 있는 전문 콘텐츠 브랜드로 다시 정의될 필요가 있다고 강조한다. 각 잡지사 역시 자신이 다루는 분야에서 가장 깊이 있고 정확한 정보원이라는 입장을 견지해야 한다는 이야기다. 따라서 단편적인 정보의 제공이 아닌, 풍부하고 깊이 있는 읽기의 경험을 제공할 때 비로소 잡지의 가치가 회복될 수 있다고 보고 있다. 이 같은 방향 전환을 위해 협회 차원에서는 AI 기반 콘텐츠 큐레이션을 도입하고, 디지털 유통망과의 연계를 강화하는 한편, 대형 포털사이트와의 제휴 서비스 등을 통해 독자와의 접점을 넓혀 나갈 계획이다. 이를 통해 다시 독자의 선택지로 자리 잡을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겠다는 구상이다.
정책 파트너십의 강화
백 회장은 무엇보다 정부와의 협력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취임 이후 가장 먼저 정부와 국회를 직접 방문해 잡지의 역할과 현실을 알리는 데 힘썼습니다. 잡지는 결코 사양 산업이 아니라, 정신문화의 근간임을 강조했습니다. 독립운동과 민족계몽운동, 근대화, 산업화, 민주화에 이르기까지 담론을 이끈 잡지의 역사와, 가짜 뉴스가 범람하는 시대에 정제된 정보, 깊이 있는 전문 콘텐츠, 공신력 있는 매체인 잡지가 얼마나 중요한지 설명했습니다. 앞으로는 호소를 넘어 데이터와 정책 대안을 중심으로 설득하며, 제4차 잡지진흥계획의 실효성 강화와 저작권 보상 체계 개선, AI 디지털 전환 지원 등을 구체화해 정책 연계를 추진할 것입니다. 특히 문화체육관광부와는 잡지 정책 전반을 논의하고 있으며, 국회 문화체육관광위원회와도 긴밀히 소통 중입니다. 특히 제4차 잡지진흥계획 수립, 잡지 소득공제 특례법 재발의, 문화정책 편입, AI 콘텐츠 사업 등이 협회의 핵심 과제로 공유되고 있습니다. 일시적인 협력을 넘어 지속 가능한 정책 파트너십을 구축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봅니다. 앞으로도 책임 있는 정책 파트너로서 역할을 다할 것입니다.”
특히 백 회장은 협회의 조직 운영에도 많은 신경을 쓰고 있다. 무엇보다 기존의 ‘닫힌 조직’에서 벗어나 ‘열린 조직’으로의 전환을 추진하고 있는 것이 중요한 포인트다. 회장 중심의 운영 방식에서 나아가 위원회와 회원 참여를 중심으로 한 구조를 강화하고 있으며, 운영 전반에서 투명성과 소통을 핵심 가치로 설정하고 있다. 이를 통해 회원사의 역량을 결집하는 플랫폼으로서, 투명하고 공정하며 공평하게 운영되는 협회를 지향한다는 방침이다. 이와 함께 협회의 기강을 바로 세우고, 그동안 저하됐던 협회의 위상을 회복하기 위한 작업도 지속적으로 이어갈 계획이다. 조직 내부적으로는 사무처 역시 미래 비전을 공유하며, 밝고 활력 있는 근무 문화를 조성하는 데 힘을 쏟고 있다. 아울러 미래청년위원회를 중심으로 협회의 중장기 방향을 구상하고, 실질적인 발전 방안을 모색해 나갈 예정이다. 이러한 조직 운영을 통해서 궁극적으로는 회원사들이 ‘신뢰도 높은 미디어’로서의 잡지를 만드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최근 국제잡지연맹(FIPP)과 세계신문협회의 합병에서 보듯, 글로벌 미디어 환경은 ‘통합’과 ‘연결’로 바르게 이동하고 있습니다. 해외 선진 잡지 시장에서 공통적으로 보이는 특징은 전문성의 극대화와 플랫폼 다각화입니다. 잡지는 대중매체가 되려고 하기보다, 특정 독자층을 위한 가장 신뢰도 높은 미디어로 자리매김하고 있습니다. 46만 명의 유료 구독자를 확보하고 있는 일본 여성 시니어 잡지 하루메쿠의 사례는 하나의 방향성을 잘 보여줍니다. 한국 잡지 역시 규모 경쟁이 아니라 정체성과 깊이의 경쟁으로 전환해야 할 시점입니다. 해외 선진국의 잡지들은 단기 트렌드에 흔들리기보다, 자신들이 다루는 분야에서 신뢰받는 ‘기록자’ 역할을 해 오고 있습니다. 종이와 디지털을 대립시키기보다, 각 매체의 강점을 살려 공존시키는 전략 역시 참고할 만한 지점입니다.”
다음 단계를 향한 전진
앞으로 남은 임기 동안 백동민 회장은 해야 할 일이 많다. 잡지가 정책과 제도의 주변부에 머무는 존재가 아니라, 산업과 공론장의 중심에 설 수 있는 구조를 만드는 것을 핵심 과제로 제시하고 있다. 이를 위해 잡지진흥 정책 전반의 틀을 재정비하고, 우수 전문잡지를 대상으로 한 ‘백년잡지’ 인증제도를 안정적으로 정착시켜 기존의 우수 콘텐츠 지원 사업과 병행해 운영하겠다는 구상이다. 아울러 대형 포털 사이트와의 제휴를 통해 온·오프라인 콘텐츠의 유료화를 추진하고, 이를 기반으로 보다 다양한 수익 구조를 마련하는 방안도 주요 목표로 설정돼 있다. 이를 통해 잡지가 지속 가능한 산업으로 자리 잡을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겠다는 방향이다. 백 회장은 마지막으로 이와 같은 희망의 메시지를 남겼다.
“잡지는 시대를 비추는 거울이자 정신문화의 근간입니다. 잡지산업은 여전히 어렵고, 각자의 현장은 녹록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잡지는 언제나 시대의 가장 깊은 이야기를 기록해 왔으며 여전히 우리 사회에 필요한 매체입니다.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각자의 자리에서 묵묵히 잡지를 만들어 오신 모든 분들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협회는 여러분의 곁에서 함께 버티고, 함께 길을 만들어 가겠습니다. 잡지의 매력과 가치를 널리 알리고, 지속 가능한 산업으로 만들어 가고 싶습니다.”
인류가 존재하는 한, 지식과 정보에 대한 욕구는 영원하다. 그런 점에서 잡지는 앞으로도 그 위상은 변하지 않는다. 다만 이러한 역할을 담당할 잡지 자체가 어떻게 변하느냐가 문제다. 백동민 회장이 이러한 대한민국 잡지사의 새로운 기원을 열어 나가길 응원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