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대웅음악장학회’ 설립,
합천이씨서울종친회 별도로 만들어...

1941년 경남 합천 출생으로, 진주농림고를 자퇴한 뒤 부산과 서울 등지에서 신문 배달, 부두 하역, 탄피 수집, 고물상을 하다 1975년 동아항공화물을 설립했다. 젊은 날의 극한적인 어려움에서 얻어진 냉정한 세상사를 읽은 혜안으로 시대를 냉철하게 읽으셨다.
장남을 앞세운 슬픔이 채 가시기도 전에 셋째 대웅군이 학폭으로 인한 사망 소식을 해외 출장중에 듣고 모두를 용서하자는 결심을 내린 군자의 모습을 보였다. 서울예고 개교 70주년인 올해 5월 서울아트센터를 평창동에 개관했다. 학교 폭력으로 막내아들을 잃었지만, 그 아들이 다녔던 학교가 도산 위기에 처하자 학교 재단을 인수한 이대봉 참빛그룹 회장(서울예술학원 이사장)이 지난 1일 별세했다.

‘이대웅음악장학회’ 설립,
1988년 장학회를 세우고 2010년에는 도산 위기에 놓인 서울예고와 예원학교를 인수해 이사장을 지내는 등 교육에도 남다른 관심을 쏟았다. 1987년 당시 서울예고 2학년이었던 막내 아들 이대웅군이 학교폭력으로 목숨을 잃은 사건이 계기가 됐다.
대웅장학회를 설립하여 수많은 후학들에게 배움의 길을 열었다. 참빛가스산업 등 에너지 분야로 사업을 확장했고, 베트남에 진출해 그랜드 프라자 하노이 호텔, 하노이 휘닉스 골프리조트를 운영하고 있다. 2010년 도산 위기의 서울예술학원을 인수해, 서울예고 개교 70주년인 올해 5월 서울아트센터를 평창동에 개관했다. 학교 폭력으로 막내아들을 잃었지만, 그 아들이 다녔던 학교가 도산 위기에 처하자 학교 재단을 인수했다.
당시 그는 가해 학생을 응징하거나 보복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용서했다. 담당 검사조차 선처할 수 없다고 했지만 그는 가해 학생을 구명하는 운동까지 벌였다. 이후 서울예고 학생들은 돈을 모아 학교 안에 음표 모양의 추모비를 세웠다. 이대웅군 사건 이후 서울예고에선 학교폭력이 크게 줄었다.
그는 이후 가해 학생을 용서한 이유에 대해 “‘피해자 아버지가 혹독하고 돈 밖에 모르니까 하나님이 데리고 가셨다’는 소리를 안 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며 “복수를 한다고 아이가 살아 돌아오는 것도 아니고, 내가 난동을 피우면 아버지가 저러니 아들이 벌을 받았다 할 거다. 가톨릭 신자인데, 아들을 위해서라도 ‘원수를 사랑하라’는 하느님 말씀을 실천해 보기로 했다”고 했다.
“용서한 걸 후회하지 않는다”고도 했다. “아들을 생각하면 자다가도 울분이 용솟음치지만 용서의 힘이 복수의 힘을 앞선다고 믿는다”고 했다.
그는 사업가보다 예술 교육 지원자로 널리 알려졌다. 장학회를 설립해 36년간 형편이 어려운 인재를 지원했고, 2010년 사재 200억원을 털어 도산 위기에 놓인 서울예고와 예원학교를 인수해 학교법인 서울예술학원의 이사장이 됐다. 작년 5월엔 서울예고 개교 70주년을 맞아 서울 평창동 교내에 서울아트센터를 설립했다.
서울대 입학생이 가장 많은 고교인 서울예고가 사라지면 아들이 꿈꾸던 ‘세계 무대를 누비는 대한민국 예술인’이 나오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는 것. 이 회장은 생전 “내 아들의 꿈이 자라던 학교여서 그냥 문 닫게 놔둘 수가 없었다”고 했다.
고인은 1988년 ‘이대웅음악장학회’를 설립했다. 수많은 학생들이 학회의 도움을 받았다.
베트남에서도 장학사업을 벌였다. 2011년 베트남 보국훈장, 2012년 베트남 정부 보훈훈장 등을 받았다. 독립운동가 자녀들과 독거 노인, 치매 노인들도 도왔다.

합천이씨서울종친회 별도로 만들어...
경주이씨화수회의 규모가 방대해지자 1980년 1월부터 합천이씨서울종친회를 별도로 만들어1대2대 이희성 회장(육군참모총장/교통부장관), 3대4대 이만섭 회장(국회의장), 5.6.7.8대 이상싀 회장(건설부장관)에 이어 9대를 맡아서 전자족보를 완성시키고 집안의 대소사를 슬기롭게 플어 나가면서 큰 업적을 남기셨다. 젊은 날의 극한적인 어려움에서 얻어진 냉정한 세상사를 읽은 혜안으로 시대를 냉철하게 읽으셨고 장남을 앞세운 슬픔이 채 가시기도 전에 셋째 대웅군이 학폭으로 인한 사망 소식을 해외 출장중에 듣고 모두를 용서하자는 결심을 내린 군자의 모습을 보였으며대웅장학회를 설립하여 수많은 후학들에게 배움의 길을 열었다.
중국의 문이 열리자 길림성에 해란강 골프장(36홀)과 백두산에 호텔과 함께 백두산 등산로를 닦아서 많은 외화를 거둬들였으며 멀리 베트남에 54홀의 휘닉골프장과 그랜드호텔을 지어 국위를 선양시키고 있다. 늘 삶의 언덕이 되어주셨던 이대봉 회장님의 갑작스런 선종은 큰 슬픔과 함께 큰 가르침을 남겼다.
이 가을 한잎의 낙엽이 떨어지듯 우리의 곁을 홀연히 떠나신 이대봉 회장님!

부디 극락왕생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