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발견
헨드릭은 생각만해도 사랑스러운 작가이다. 막내동생같기도 하고 어떨땐 큰아버지의 아들처럼 마음고운 조카같기도 하다. 일곱 아이의 아버지인데서 그 사연을 찾을 수 있다. 길에 버려질 수도 있는 아이 셋을 자기 아이로 키우고 있기 때문이다. 아프리카란 곳이 자기 먹고 살기도 힘든 곳인데, 헨드릭은 밖에서 데려 온 아이들을 비용이 많이 드는 사립학교에 보낸다. 그림이 아주 잘 나가는 작가임에도 불구하고 항상 통장에 잔고가 없다는 이유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이야기하지 않아도 난 항상 선불로 그림 값을 보낸다. 아이들의 용돈도 더해서^^
헨드릭에게 있어서 "아이는 어른의 아버지"라는 명제는 절대반지와도 같다. 아이는 자신이 추구하는 이데아의 내용이기 때문이다. 그림을 그릴때나 그리지 않을 때, 그의 시선은 항상 아이한테 초점이 맞춰진다. 많은 사람들이 붐비는 전시중의 퍼포먼스때도 예외는 아니다. 아이들의 기쁨도, 놀람도 그리고 때쓰는 순간도 놓치지 않는다. 그 모습은 그냥 마음으로 직결된다. 계산된 마음이 아니다. 심성을 그대로 드러내는 행위 혹은 상대의 심성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행위 이 모든 것이 그림의 주제이다. 그림 속 다양한 표정은 결국 아이를 닮고 싶어하는 헨드릭의 꿈이다. 현실은 그런 아이의 모습대신에 감추고 속이는데 익숙한 어른을 강요하는데서 헨드릭의 절대반지는 더욱 더 빛을 발한다.
앞으로 세명을 더 입양하고 싶다는 헨드릭의 눈매에서 남이 부럽다는 생각을 처음 해보았다. 경제적으로 적당한 부모를 만나 적당한 학교를 나오고, 적당히 직업생활하다 적당히 맞는 것 같은 사업을 하고 있는데 누가 부럽기는 처음인 것 같다. 그가 헨드릭이다. 그렇다고 헨드릭이 마냥 이상적인 삶을 사는 관념적인 작가는 아니다. 아이들 수에는 못미치지만 그는 집이 네채다. 조수도 많다. 나는 항상 이런 말을 한다."가장 이상적인 것이 가장 현실적이고, 가장 현실적인 것이 가장 이상적이다"라고. 전자에 대해서는 동의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후자는 갸우뚱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때면 난 유대인을 보라고 한다. 기막히게(?) 돈을 벌기도 하지만 기부는 가히 상상을 불허하기 때문이다. 헨드릭도 아이들은 위해 멋지게 돈을 쓰는 작가이다. 그리고 훗날 어린이 미술학교를 열겠다고 한다. 현실을 이상으로 웅비시킬 일만 남아 있을 뿐이다.
☆tip1_작가에 대한 예의와 에필로그
거의 매년 나오는 헨드릭의 카탈록도 점점 두꺼워지고, 잡지의 기사도 쌓이고 있다. 그러나 아직은 팅가팅가나 두츠처럼 단행본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예전의 책과는 다른 시선을 보여주고 싶다보니 시간에 붙잡혀 있다. 더구나 외할아버지인 조지 릴랑가와 함께 묶어서 출판하려고 보니 고민은 배가 아닌 트리플 그이상이 된다. 조급함과 편안함 사이에서 오락가락하고 있다. 다행인 것은 2023년 헌드릭의 한국방문과 함께 그만을 위한 70여쪽의 카탈록이 나왔다. 듸디어 첫발을 내딛었다. 반은 온것이다.
♤헨드릭의 세계관은 인간관으로 통한다.
#아프리카적이며 아프리카적이지 않은 헨드릭
헨드릭은 주변 사람들때문에 힘들고 마음 아파하는 일이 자주 일어난다. 아프리카 사람들 특성상 한사람이 경제적으로 성공하면 주변사람들은 바라는게 많아진다. 헨드릭만 하더라도 외할아버지인 조지 릴랑가가 없었다면, 헨드릭은 그냥 가난한 작가였을거라고 하며 릴랑가 가문에서 많은 희생을 강요하기도 한다. 그럴때면 헨드릭은 당신들도 좀 부지런히 살고 부지런히 그림을 그리면 사는데 지장이 없을것이라고 강변하지만, 그게 먹히질 않는다. 술과 마약과 여자 그리고 게이름에 빠지기 쉬운 곳이 아프리카인데 많은 사람들이 여기에 속해 있기 때문이다.
새벽까지 술을 마셔도 헨드릭은 이른 아침부터 운동하기를 주저하지 않다. 예전에 밤늦게까지 조지 릴랑가 아들들과 술을 마시며 집의 철제 대문 세짝을 거래한 적이 있었다. 그날 아침 일찍 헨드릭은 용접기를 들고 릴랑가 아들집을 찾아가 철문을 떼어 왔다. 아침이면 마음이 변할 것을 잘 알기에 그들이 잠을 깨기전에 일을 감행한 것이다. 아프리카에서 즉흥적인 거래, 이중적인 거래, 웃돈 요구는 물론 말바꾸기가 일상인 것을 헨드릭은 잘알기 때문이다. 자기를 제대로 관리하지 않는 사람치고, 성공한 사람은 드물다는 점에서 그는 분명 성공에의 가능성이 아주 큰 작가이다.
여느 작가들처럼 주변의 누군가에게 그림을 배운 헨드릭은 어느 정도 그림이 도식화되어 있다. 그러나 한국은 물론 일본이나 여러나라를 방문하다보니 미세한 차이에서 큰 변화가 보이고 있다. 컬러풀한 아프리카 그림만 그리다가 한국의 단색화를 보고, 아프리카 단색화를 그렸던 헨드릭! 그런 그림을 보고 'colorful mono tone' 화려한 단색이라고 명명했다. 사실 아프리카 그림에서 컬러를 빼면 앙꼬없는 찐빵과도 같기 때문이다. 일본에 있을때부턴 외할아버지의 전통 속 인물들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일본 도깨비 영향인지 머리 위에 뿔도 그리고, 얼굴의 모습은 길쭉하거나 넓적해지고 몸도 기하학적으로 표현해 도통 종잡을 수 없는 모습으로 그려졌다. 언제부터인지 바탕색도 단색이 아니고, 그라데이션하지도 않은 회화적 요소가 보이기도 했다.
#진보에의 용기를 변화무쌍하게 실천하는 헨드릭
작가의 성공은 기획자의 큰 자부심이기도 하고, 경제적 부도 동반하는 즐거움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헨드릭은 여러모로 성공의 조건들을 갖추고 있다. 그의 삶에 대한 이력이나 세계관은 물론 작품 자체에서도 여느 작가와는 다르기 때문이다. 그의 그림에는 세가지 스타일이 있다. 컬러풀한 그림, 파스텔톤의 그림, 모노톤의 그림, 이 세가지를 동시에 작업하고 있다. 그래서 컬러풀한 그림은 태양이 눈부신 LA 아트페어로, 파스텔톤의 그림은 태양이 따사로운 마이애미 아트페어로 그리고 빌딩 숲에 가려 태양마저도 을씨년스러운 뉴욕에는 모노 톤의 그림을 타켓으로 해야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사실 모노 톤의 그림은 유럽쪽에서도 통할거라고 어느 컬렉터가 살짝 귀뚬을 해주기도 한다. 아프리카하면 컬러풀할거라는 일상을 벗어나게 해주기에 주목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어느 지역이 한가지 풍으로 대변될 수는 없다. 글로벌한 시대에서 그림의 취향 역시 국경이 있을수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장은 많이 다르다. 한국의 경우만 보더라도 헨드릭 그림은 부산이나 울산에서 아주 잘 나간다. 광주는 거의 판매가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반추상적 팝아트인 조엘 음파두나 두츠의 그림은 광주와 대구에서 잘 나간다. 물론 서울은 전국구다. 균형 고르게 잘 나가는데 헨드릭이 대세다. 요즘 젊은 콜렉터들에게 어필이 잘 되는 만화적 팝아트가 헨드릭 그림과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헨드릭의 그림은 우리나라 초등학교 3학년과 5학년 교과서에 수록되서 그런지 아이가 있는 젊은 부부에게는 가히 천하무적이다. 2024년부터는 6종의 교과서에 헨드릭의 그림이 더 실릴 예정이라 더욱 기대가 된다
언제부터인가 내가 핸들링하는 작가를 한국에서만 띄운다는 것이 답답하다는 생각을 했다. 아마도 팅가팅가의 그림을 가지고 브리티쉬 뮤지엄에서 전시를 추진하는 것처럼, 해외 아트페어에 초점을 맞춘 것은 자연스러운 일인지도 모른다. 작가 역시 나에게 기대하는 바가 단순히 한국시장에서 몇점 파는게 전부가 아닐거라는 생각도 해보았다. 몇년전 잠시 해외 아트페어를 노크한 적이 있었지만, 시기상조였다. 시장이란게 신념만 가지고 통하는게 아닌데 무식용감의 결과는 경제적 손실로 다가왔다. 정신이 들었다. 작가에 대한 체계적 접근없이 마음만 앞선게 기획자나 작가에게 독이 됨을 알게 되었다. 작가에 대한 내면세계에 대한 탐구는 물론 작품 개개에 대한 글을 체계적으로 쓰기 시작한게 그때부터인 것 같다.
#빛의 행렬처럼 한곳으로 향하는 헨드릭의 그림
작가와 나만 알았던 사인같던 그림에 제목이 붙여졌다. 비슷했던 그림이 달리 보이기 시작했다. 악기가 들어가면 '페스티발', 일상의 모습을 담으면 '해피 패밀리', 옷차림이 튀고 모자나 핸드백이 등장하면 '패션 쇼', 자동차에 동물들이 등장하면 '사파리'...그렇게 여러 제목들이 붙여지면서 작품들은 생명활동을 하듯이 많이 나가게 되었다. 어떤 해에는 '덴티스트' 그림이 많이 나가면서 치과협회에 나아가 아프리카 치과에 대한 강연도 했다. 주제에 대한 글도 차곡차곡 쌓이면서 헨드릭의 카탈록은 그림과 함께 글도 디자인의 영역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우리나라의 초등학교, 고등학교 교과서 아홉군데에 헨드릭의 그림이 들어가면서 작가나 나는 큰 보람을 느꼈다. 그것은 단지 프라이드에 관한 것만은 아니었다. 왜 헨드릭이라는 아프리카 작가 그림이 우리나라학교 교과서 실렸냐는 점이다. 사실 아프리카는 여러모로 우리보다 수십배는 더 어려운 환경 속에 노출되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프리카사람들은 자신들이 불행하다고 생각지 않는다. 자살하는 사람들이 드물거나 오히려 낙천적인 모습에 우리들이 배울 점이 많다는 것, 이 점을 우리가 숙고하자는 것이다. 3학년 책에 나온 '해피 패밀리'라는 작품만 보더라도 그들은 누군가가 내 옆에 있다는 것, 그자체를 행복이라 여긴다. 5학년 책의 '페스티발'이라는 그림도 여럿이 함께 춤을 추다보면 절망에 빠지지 않는 힘을 발견한다고...
우리는 참으로 많은 것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행복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적다. 상대적 박탈감이 병적으로 굳어 있는지도 모른다. 남과 모든 것을 비교한다. 부족한 것만 부각시켜 자신을 비하시키기도 한다. 그러다보니 방향은 절망의 끝으로 자신을 몰고간다. 그래서 혼술혼밥이 일상화되고 급기야는 자살에도 쉽게 접근한다. 헨드릭의 '덴티스트'라는 그림을 보면 이를 빼는 이의 옆에 머리를 감싸거나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는 이들이 목격된다. 환자가 아니다. 친구따라 강남가던 시절처럼, 아픈 친구가 병원갈 때 함께 간 것이다. 그리곤 함께 아파한다. 헨드릭은 휴머니티의 실천이 아주 쉽다고 한다. 친구따라 강남가듯이 그냥 함께 있어주고 가끔은 함께 아파해주면 그걸로 끝이란다. '여럿이 함께' '누군가와 함께' 그자체가 휴머니티라고 역설하고 있는 것이다.
#아프리카적인 아이덴티티를 일상화하는 헨드릭
헨드릭은 멋을 아는 작가이다. 이는 내외면 모두에 해당되는 말이다. 한국에 왔을 때 예상보다 길게 거주하다보니 쌀쌀한 날씨가 장애로 다가왔다. 그때 아무말도 묻지 않고 두툼한 잠바를 사주었다. 몇일 입더니 추워도 입지를 않는다. 나중에야 알았지만 자기 취향이 아니란다. 그에게 있어 옷은 추우면 그냥 입는게 아니었다. 그의 지론에 따르면, 비싼 옷은 아닐지라도 자기한테 잘 맞는 옷을 입고 거리로 나가면, 이사람 저사람이 쳐다보는데서 어깨에 힘이 들어간다고 한다. "나는 너와 다르다"라는 그런 마음, 그게 삶의 원동력이 된다는데서 그의 그림 속 패션쇼는 아프리카적인 아이덴티티에 대한 스토리 텔링이다.
우리는 그냥 일상처럼 아프리카 작가들이 색을 잘쓴다고 이야한다. 그러나 그 이면을 아는 이는 드물다. 내가 아는 아프리카 작가들은 선천적이라기보다는 후천적으로 색에 대한 특별한 유전자를 키워왔다. 아장아장 기어다닐때부터 색에 대한 특별함이 있는 아이들은 엄마나 누이가 두른 큰 보자기 같은 옷을 보고 자랐다. 몸매나 피부색에 잘 맞춰진 한폭의 그림을 자연스럽게 학습시킨 것이다. 그런 옷을 입고 동네를 활보하던 엄마와 누이에게서 아이는 뭔가 특별함을 보았을 것이다. 엄마와 누이의 몸매 풍성함에서 오는 조형성도 보았을테고, 움직이는 색채와 문양들에서 입체성도 보았을 것이다. 무수한 인파로 뒤범벅된 시골장터에서도 엄마의 옷이 돗보이는 특별함도 보았을 것이다.
아이는 또 천년 이상을 한자리에서 지켜온 들판의 바오밥 나무의 꽃도 보았다. 산더미같이 큰 나무에서 피는 꽃을 머리로 재단하기보다 몸으로 색을 느끼기도 하였다. 어린 아이의 천진난만함처럼 색을 체화시킨 것이다. 사실 자연 속에 놓여진 다양한 꽃들의 색은 그 어떤 빛깔을 가지고 있어도 충돌되지 않는다. 비슷한 색끼리도 어울리고, 다른 색조차도 기묘한 보색효과를 통해 거부감을 일으키지 않는다. 여느 작가처럼 헨드릭은 이런 시절을 보내 지금의 자리에 와 있다. 그래서 감히 말한다. 아프리카 작가들의 새사용을 감히 누가 넘볼수 있냐고... 그래서 헨드릭은 물론 다른 작가들의 미래는 가히 대단해질 수 있다고 과언한다.
☆tip2_인간애를 꿈꾸는 헨드릭
모두가 그러하듯이, 헨드릭은 꿈을 품는 작가이다. 그에게 그림은 꿈이고, 꿈은 그림이다. 모두가 꿈이고, 모두가 그림인것이다. 그런 헨드릭에게 남다른 점이 있다면 꿈 속에 꿈이 있고, 그림 속에 그림이 있다는 것이다. 다소 복잡한 말같지만 단순하다. 수많은 이야기 한가운데에 인간이 있다는 것이다. 휴머니티가 바로 그림이고, 꿈이라는 것이다.
자기 아이 다섯에 버려진 아이 셋을 함께 키우는 헨드릭! 그의 눈매에서 꿈이 보이는 것은 우연이 아닐것이다. 그의 그림에 등장하는 수많은 사람들... 굳이 설명 안해도 그림이 꿈이 되는 순간이다. 그림이 꿈의 내용이 되어 예쁜 옷을 함께 입고, 거리를 함께 활보하고, 함께 춤을 추고, 함께 병원에 간다. '함께'라는 말이 바로 휴머니티의 구체성이다.
휴머니티는 헨드릭에게 아주 명료하다. 그저 오늘에 대해 최선을 다하면 그만이다. 실체를 알 수 없는 내일에 대해 불안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어제에 집착하고, 내일에 근심을 둔다면, 오늘은 위축되어 상실로 이르게 된다. 휴머니티도 더불어 상실이다. 오늘에 최선을 다하는 아프리카의 낙천성이 곧 그의 그림이다. 휴머니티의 실천이다! 헨드릭에게는...
♧헨드릭 그림읽기
#사파리(Safari)
여느 아프리카 작가처럼, 헨드릭의 그림에도 자동차가 자주 등장한다. 그러나 차의 크기가 다르다. 아는 사람만 타는 작은 차가 아니다. 큰 차가 대부분이다. 스와힐리어로 여행을 뜻하는 '사파리(safari)'에 담긴 의미를 가늠할 수 있는 모습이다. 헨드릭에게 있어어 사파리란, 서로 모르는 사람들이 여행을 통해 함께 하나가 되는 것이다. '우리'가 된다는 말이다. 이데아와도 같다. 그가 표현하는 우리는아는 사람들만의 우리가 아니다. 길떠남에서 나와 남과의 구분이 없어지는 외연확장이다. 아프리카에서 공동체가 강조되는 이유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우리라는 관계는 다시 친족이라는 혈연 공동체로 전화되어 가족관계에 기반을 두는 새로운 담론을 형성한다. 수 백의 가족으로 얽힌 공동체는 종족의 운명과 궤를 같이 하게 된다. 사파리란 아프리카 사람들이 지향하는 유토피아와도 같다. 이에 헨드릭은 문명이 빠르게 변하는 만큼 사파리 그림을 더 그리겠다고 한다. 인간의 관계를 좀 더 돈독히 하고픈 소박한 지론이다. "여럿이 함께, 누군가와 함께 사파리를..."
#Car racing
헨드릭의 자동차는 어디론가 떠나기를 바라는 자유로운 꿈의 도구이다. 아프리카 사람들이 지닌 유목민의 유전자와도 같은 것이다. 그런점에서 카 레이싱이라는 주제는 꿈을 향해 빠르게 질주하려는 욕망의 모습도 담겨 있다. 50대에 접어드는 작가라면 누구나 거쳐야 할 자신과의 싸움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헨드릭은 '여럿이 함께'라는 이데아의 내용을 포기하지 않는다. 경주에 임하는 드라이버나 관객들의 표정에 즐거움이 보이기 때문이다. 혼자가 아닌 여럿이 함께 하기에 드라이버와 관객은 서로 분리되지 않는 것이다. 세상은 카 레이싱처럼 빠르게 질주하지만, 인간의 관계를 돈독히 하려는 헨드릭의 지론이 잘 담겨진 그림이다.
#심포니
같은 악기를 연주하더라도 소리가 다르다. 쌍둥이의 지문이 다르듯 개체의 중요성을 '심포니'라는 주제로 풀어내고 있는 것이다. 양쪽에서 울려퍼지는 나팔소리에 피아노가 하모니를 만들어 낸다. 헨드릭이 전하는 메시지의 하이 라이트는 담안의 연주자와 담밖의 관객들이 하나가 된다는데서 클라이막스에 이른다. 모두가 함께라는 것이다. 헨드릭의 음악은 안과 밖의 경계를 무의미하게 만들고, 너와 나의 벽을 허문다는 점에서 음악 그 이상을 담게 된다. 절망이라는 덫에서 빠져 나오게 만들기도 한다. 하나가 아닌 여럿이서 함께이기에 가능한 일다. 그런 점에서 헨드릭의 심포니라는 주제는 하모니를 넘어서 절망에 빠지지 않게 하려는 집단적 엑스터시(collective ecstasy)를 제공하고 있다.
#패션쇼(Fashion show)
헨드릭의 패션쇼란 주제는 아이덴티티에 대한 이야기이다. 멋진 옷을 입고 거리를 나설때 누군가의 주목을 받는것, 그것은 내가 세상의 주인공이라는 즉 나는 너와 다르다는 자기정체성을 말하기 위함이다. 남과 구별되는 자기 고유의 그 무엇이 옷에만 한정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헨드릭의 패션쇼는 드라마틱한 내용을 지니게 된다. 피부색을 다양하게 표현한 것이 바로 그것이다. 이는 어제의 마음과 오늘의 마음이 다르다는 것을 색으로 나타냈는데 헨드릭은 여기에서 "삶이란 끊임없이 변화를 추구할때 비로소 자기가치가 빛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결국 피부색은 자기정체성을 추구하는 또 다른 통로의 모습이기도 하다.
#화려한 단색(Colorful mono tone)
한국의 단색화를 자주 접한 헨드릭이 어느날, 'colorful mono tone' 이라 하면서 그림들을 내밀었다. 분명 한가지 톤인데도 화려하다 못해 빛이 난다. 다양한 색채의 그림보다 오히려 눈길을 끈다. 한국의 단색화와 다른 점이 있다면, 색이 주는 본성을 포기못한것 같다. 사실 아프리카 그림에 있어서 화려한 색을 포기한다는 것은 앙꼬없는 찐빵과도 같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의 단색화를 '화려한 단색'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지루하지가 않다. 화려함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어떻게 보면 화려하지도 않다. 모노 톤이기 때문이다. 오묘하다. 검은 피부가 수백 수천의 색을 지니듯, 헨드릭의 화려한 단색은 수 많은 이야기가 단순해지거나 혹은 아주 다양하게 풀어지고 있다.
☆tip3_ 헨드릭 그림 속 디자인은 상형문자이다
여느 아프리카 작가처럼 헨드릭도 그림 속 여백을 그냥 지나치지 못한다. 하고픈 이야기가 많아서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비'다. 그의 그림 속 흰 동그라미는 하늘 구름 속에 있는 수분을 의미한다. 사람들이 간절히 바라면, 흰 동그라미는 똘똘 뭉쳐져 비가 되어 땅으로 내린다. 지그재그 모양도 결국은 비의 모습이다. 사실 비는 일자로 내리지만 많은 비가 내리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비를 지그재그로 그렸다. 땅위에 흐르는 강물도 굽이굽이 그렸다. 물을 가득 채우고 픈 마음의 모습이다. 까만 동그라미도 보인다. 땅속의 씨앗이다. 음양이 합쳐지듯 검은 동그라미의 간절한 바람은 흰 동그라미를 만나 무럭무럭 지란다. 풍요다. 그래서 사람들은 환호하며 악기를 두드리고 춤을 춘다. 하늘도 덩달아 기뻐했다. 모두의 축제가 되었다. 작은 동그라미조차도 사람들은 절망에 빠지지 않게 했다. 헨드릭 그림 속 아프리카에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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