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최대 경제 대국인 미국이 다시 고물가의 압박을 받고 있다. 미국의 5월 소비자물가지수는 전년 같은 달보다 4.2% 올랐다. 몇 달 전 2~3%대까지 내려갔던 물가 상승률이 다시 4%대로 올라선 것이다. 특히 미국인들의 생활을 직접 압박하는 것은 휘발유와 식료품, 주거비, 각종 수입품 가격이다. 물론 물가 상승의 모든 원인을 트럼프 대통령 한 사람에게만 돌릴 수는 없다. 세계 경제의 공급망 문제, 중동 정세, 에너지 가격, 과거부터 누적된 주거비 부담 등 여러 요인이 겹쳐 있다. 하지만 트럼프 행정부의 관세 정책과 대외 군사 정책이 최근 물가 부담을 키운 요인 가운데 하나라는 점은 부인하기 어렵다. ‘세계에서 가장 강하고 잘사는 나라’의 국민인 미국인들의 삶은 왜 이렇게 된 것일까?
미국은 거대한 물류 국가
미국의 고물가를 이야기할 때 가장 먼저 봐야 할 것은 에너지 가격이다. 미국과 이란을 둘러싼 군사적 긴장이 커지면서 국제 원유 시장은 크게 흔들렸다. 특히 세계 원유 수송의 핵심 통로인 호르무즈 해협을 둘러싼 불안이 커지자 그 영향은 즉각적으로 시장에 반영됐다. 이 충격은 미국인들의 일상에도 곧바로 영향을 미쳤다. 미국은 자동차 없이는 생활하기 어려운 지역이 많다. 출퇴근, 장보기, 자녀 등하교까지 자동차에 의존하는 가정이 적지 않다. 한국에서 커피값이 오르면 커피를 줄일 수 있지만, 미국에서 휘발유 가격이 오른다고 출근을 줄이기는 어렵다.
최근 미국의 전국 평균 휘발유 가격은 갤런당 3달러 후반대까지 올랐다. 과거에 4달러 후반대까지 오른 충격적인 가격은 아닐 수도 있지만, 가정 경제에 부담을 느끼기에는 충분한 수준이다. 자동차 한 대에 15갤런을 넣는다고 가정하면 갤런당 가격이 1달러 오를 때마다 한 번 주유할 때 15달러를 더 내야 한다. 일주일에 한 번 주유하는 가정이라면 한 달에 60달러 안팎의 추가 부담이 생긴다.
기름값 상승은 주유소에서 끝나지 않는다. 미국은 거대한 물류 국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식료품과 생필품은 트럭과 항공기, 선박을 통해 미국 전역으로 이동한다. 유가가 오르면 운송비가 오르고, 운송비가 오르면 기업은 그 비용을 상품 가격에 반영하려 한다. 냉장 트럭으로 이동하는 식료품, 온라인 쇼핑몰의 배송 차량, 농업 장비와 공장 에너지 비용까지 모두 영향을 받는다. 결국 전쟁은 중동에서 벌어지지만, 그 비용은 미국의 평범한 가정에서 지불한다는 이야기다.
트럼프 대통령이 동맹국에도 남발했던 관세 인상 역시 마찬가지의 작용을 한다. 그간 트럼프 대통령은 외국 제품에 높은 관세를 매기면 미국 기업을 보호하고, 해외 기업들이 미국에 공장을 지을 수밖에 없다는 논리를 펴왔다. 실제 관세는 특정 산업 보호나 협상용 압박 수단으로 쓰인 적도 많았다. 하지만 관세를 남발한다고 해서 한 나라가 무작정 잘사는 단계로 도약할 리는 없다. 그에 따른 대가를 반드시 지불해야 하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관세를 외국 기업이 미국 정부에 내는 돈처럼 생각하지만 실제 구조는 다르다. 미국으로 물건을 들여오는 수입업체가 관세를 내고, 기업은 그 비용의 상당 부분을 가격에 반영한다. 결국 더 비싼 가격을 지불하는 쪽은 미국 소비자일 가능성이 크다.
실제로 뉴욕 연방준비은행 보고서는 트럼프의 수입 관세 부담 대부분을 미국 소비자와 기업이 떠안고 있다고 분석했다. 로이터 보도에 따르면 해당 보고서는 관세 부담의 약 90%가 미국 내부에서 부담되고 있다고 봤다.
문제는 미국이 생활에 필요한 수많은 제품을 해외에서 수입한다는 점이다. 의류, 신발, 장난감, 가구, 전자제품뿐 아니라 미국 기업이 생산하는 제품에도 해외 부품이 들어간다. 자동차를 미국에서 조립했다고 해서 모든 부품이 미국산인 것은 아니다. 수입 부품에 관세가 붙으면 미국산 제품의 가격도 올라갈 수 있다. 이 때문에 미국인들은 양쪽에서 동시에 압박을 받는다. 한쪽에서는 중동 정세로 기름값이 오르고, 다른 한쪽에서는 관세로 수입품과 공산품 가격이 오른다.
월급은 올랐지만 구매력은 줄었다
물론 물가가 오른다고 해서 국민의 삶이 반드시 나빠지는 것은 아니다. 물가가 5% 오르더라도 임금이 10% 오르면 실질 구매력은 좋아질 수 있다. 문제는 반대의 경우다. 물가는 빠르게 오르는데 임금이 그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면 사람들은 열심히 일하고도 더 가난해질 수밖에 없다. 최근 미국에서 나타나는 상황이 이와 비슷하다. 5월 미국 소비자물가는 전년 같은 달보다 4.2% 올랐다. 반면 5월 실질 평균 시간당 임금은 전월보다 감소했고, 전년 대비 실질 임금도 줄었다. 명목상 임금은 조금 올랐지만, 물가 상승분을 고려하면 실제 구매력은 약해진 것이다.
이 부담은 중산층과 저소득층에게 더 크게 다가온다. 부유층은 휘발유 가격이 1달러 오른다고 식사를 줄일 필요가 없다. 하지만 월급으로 한 달을 버티는 가정은 다르다. 기름값으로 나가는 돈만큼 다른 지출을 줄여야 한다. 식비를 줄여야 하고, 여가비용도 줄여야 하고, 그나마 얼마간 하던 저축도 더 이상 할 수 없게 된다. 문제는 한 가정이 비용을 줄이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경기 자체가 둔화될 수 있다는 점이다.
실제 고용 시장에서는 이미 이상 신호가 나타나고 있다. 미국의 6월 신규 일자리는 5만 7천 개 증가하는 데 그쳤고, 시장 예상치를 크게 밑돌았다. 실업률은 4.2%로 낮아졌지만, 이는 상당수 사람이 노동시장에서 빠져나간 영향도 있었다. 아직 미국 경제가 침체에 빠졌다고 단정할 단계는 아니지만, 고물가와 고용 둔화가 함께 나타나는 것은 결코 가볍게 볼 수 없다.
미국 경제가 이런 상황에 처했다고 하더라도 단기간에 급격한 침체에 빠지기는 어렵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전망이다. 인공지능(AI)을 필두로 한 빅테크 기업들이 폭발적인 투자를 하면서 이 자금이 제조업과 서비스업 전반의 생산성을 이끌면서 완충 역할을 해주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는 전체적인 지표일 뿐, 미국 국민 개개인이 느끼는 고통은 결코 완충되기는 힘들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최근 미국인들에게 새로운 소비 방식이 등장하고 있다. 일단 백화점 등 고급 제품을 판매하는 곳의 발길을 끊는가 하면, 마트의 할인 상품을 집중적으로 구매하거나 인공지능으로 최적가를 검색하기도 한다. 또한 신용카드를 통해 생활비를 연명하는 사람들도 점차 늘어나고 있다. 심지어 최근에는 미국인들 스스로 ‘아메리칸 드림’을 환상이라고 말하는 비중이 늘어나고 있다. 유고브(YouGov)와 AP-NORC 등의 최신 조사에 따르면, 미국 성인의 약 3분의 1만이 “아메리칸 드림이 여전히 달성 가능하다”고 믿고 있을 뿐이다. 반면, 50% 이상의 미국인들은 아메리칸 드림이 “과거의 유물이 되었거나 처음부터 실현 불가능한 거짓말이었다”고 답하기도 했다. 어쩌면 트럼프 대통령 당선 이후 거대한 미국이라는 나라의 불빛은 서서히 꺼져가고 있다고 말해도 크게 과언이 아닐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미국을 더 이상 ‘과거의 미국’이라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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